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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환해망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6-10-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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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일본 도쿄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 주최한 행사 모습.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 단체는 김대중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단체를 통해 김대중에게 좌경용공 혐의를 씌웠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와 김대중<28> 1972년 10·17 비상계엄 선포 직후 보안사에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지 않은 야당 정치인들은 가택연금되거나 감시를 받았다. 그들의 집 앞에는 무장 군인들이 배치됐다. 그러나 유진산 등 정권에 협조적이었던 일부 야당 의원들은 감시를 받지 않았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야당 의원들을 상대로 유신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는 작업에 돌입했다. 각서 서명을 거부하거나 버티는 야당 의원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서명하지 않으면 정계를 떠나거나 계속 감시받고, 약.을 캐기 위한 뒷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박정희 유신 선포 때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 '망명 선택' 야당의 유력 정치인인 김대중과 김영삼은 10월 17일 박정희의 유신 특별선언과 비상계엄 선포 당시 해외에 체류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하버드대학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즉각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을 당했다. 김대중은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1971년 제8대 총선 기간 의문의 교통사고로 입은 고관절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게이오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10월 19일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17일 오후 호텔 방에서 TV로 박정희의 특별선언과 계엄 선포 뉴스를 봤다. 서울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 이희호는 “심상치 않아요. 서울에 오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며 귀국을 만류했다. 김대중은 밤새 고민했다.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은 섰는데 문제는 어디서 싸울 것인가였다.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팔에 깁스를 한 김대중이 국회의원 후보 지지 연설을 하고 있다. 김대중은 이 때 다친 고관절 치료를 위해 1972년 일본을 방문했고, 도쿄의 한 호텔에서 박정희의 유신 선포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귀국과 망명을 놓고 고심한 끝에 망명을 선택해 해외에서 유신 반대 활동을 벌였다 네임드 달팽이 . 한국일보 자료사진 “망명이냐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뜬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새벽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먼동이 틀 무렵 나는 망명을 결심했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삼인, 2011) 만일 김대중이 그때 귀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택연금 정도로 끝났을지는 의문이다. 측근 의원들과 비서들이 가혹한 조사를 받고 그의 정치자금 출처 등을 대라고 추궁당한 상황을 감안하면 김대중 역시 강도 높은 조사와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대중은 다음날인 18일 박정희의 특별조치에 반대하는 첫 성명을 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 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이다. 이는 완전한 헌법 위반 행위인 동시에 한국 내에서 민주 역량의 성장을 통해 조국 통일을 성취시키려는 국민의 염원을 무참하게 짓밟은 것’이라는 요지였다(김대중, 앞의 책).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벌인 긴 반유신 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랑하는 동포들이 얼마나 놀랐을까"...김대중 사후 발견된 '망명일기' 기록광이었던 김대중은 망명 활동 시기에도 매일 일기를 썼다. 박정희의 특별선언이 있던 1972년 10월 17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72년 10월 17일 화요일, 맑음 동경.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박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기능의 일부를 정지시켰다. 금년 내에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서 새로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다. 지금 본국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얼마나 놀라고 분노하고 상심하고 있을까.”(‘김대중 망명일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지난해 출간된 '김대중 망명일기'. 2024년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에서 유품 정리를 하던 중 발견된 1972~1973년 일기 223편을 수록했다 릴게임용의눈 . 한국일보 자료사진 망명일기에는 김대중이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력 정치인과 학계 인사, 언론인들을 만나고, 언론 기고와 강연 등을 통해 유신체제를 비판한 활동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김대중은 생전에 망명 시기 일기를 썼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망명 중에 쓴 일기 수첩 6권은 김대중과 부인 이희호 사후 동교동 사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를 김대중도서관이 판독·정리해 ‘김대중 망명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김대중이 일기 속표지에 붙인 제목은 ‘望鄕日記’(망향일기)였지만 편집 과정의 논의 끝에 책 제목은 ‘망명일기’로 결정됐다. 출판된 망명일기에는 유신 발표 2개월여 전인 8월 3일부터 10월 13일 사이에 쓴 16일치 일기도 포함돼 있다. 8월 3일, 4일, 9일 일기는 고관절 치료를 위해 8월 1일부터 9일까지 도쿄를 방문했을 때 쓴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장이 지난해 8월 1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16주기 추모식에서 망명시절 DJ의 일기를 묶어 펴낸 '김대중 망명일기'를 헌정한 뒤 헌정사를 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그 가운데 신민당 유진산계가 단독으로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 유진산을 당수로 선출한 9월 26일의 일기 내용이 관심을 끈다. “유진산 씨가 이렇게 불법대회를 강행한 것을 보니 공화당이 연말 또는 연초에 무언가 일을 저지를 것 같다. 유진산 씨는 그들의 지령에 의해서 막다른 골목으로 밀려간 것이 틀림없다”고 썼다. 중앙정보부가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대(對) 야당 공작을 계속하는 것으로 미뤄 조만간 박정희 정권이 비상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의심한 것이다. 그 불길한 예감은 얼마 뒤 유신 선포로 현실이 됐다. 일본 미국 오가며 정치인 학자 언론인 만난 김대중...반 유신 활동 김대중은 일본 체류 중 자민당 내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물론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등 자민당 주류 정치인들도 만났다. 언론계에서는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주오코론, 세카이 뿐만 아니라 보수 성향인 요미우리신문 관계자들과도 접촉했다. 김대중은 11월 13일 도쿄를 떠나 미국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바다슬롯 먹튀 .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케네디, 제이컵 재비츠 상원의원과 머피 하원의원을 만났고,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학 교수, 그레고리 헨더슨 터프츠대학 교수 등 학계와 언론계 인사들을 폭넓게 접촉했다. 국무부의 마셜 그린 차관보, 도널드 레나드 한국과장 등 미국 정부 인사들도 만났다. 레나드 한국과장은 훗날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그의 구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막내동생으로 47년간 미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에드워드 케네디.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때 DJ 구명운동에 나섰고, 그의 미국 망명 기간에 도움을 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과 미국에서 김대중이 벌인 활발한 활동은 현지 언론에 보도되며 주목을 받았다. 인터뷰와 기고문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이에 한국의 정보기관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김대중의 강연 장소를 빌려준 기관에 이를 취소하도록 종용하는 등 견제에 나섰다. 1972년 12월 11일 워싱턴에서 쓴 일기에는 “뉴욕의 강연이 정권 측의 작용으로 장소를 빌려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사용을 취소한다고 한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장소 사용을 관철하도록 당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대중의 미국 내 활동에도 중앙정보부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뉴욕 컬럼비아대학 강연은 결국 예정된 장소에서 열렸고 예상보다 훨씬 많은 500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김대중은 이듬해 1월 4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거쳐 일본 도쿄로 돌아왔다. 일본의 언론계 인사와 지식인,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국의 정세와 박정희 정권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일본의 만년 여당인 자민당은 전반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분위기였으나 김대중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의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3월 25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강연과 대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그런데 강연장 앞자리를 교포 사회에 알려진 폭력배들이 차지했다. ※ 이 기사는 한국일보의 프리미엄 콘텐츠입니다. 더 자세한 기사 내용은 한국일보닷컴에서 로그인 후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링크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으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0000142 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취시키려는 국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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